[연해주 여행기] 07.28. 테러리즘 데이

2019. 8. 5. 19:50여행기/2019 Vladivostok


 

실수로 이른 시간에 설정해 둔 알람을 끄고 다시 눈을 감았다. 약 15분 정도가 지났을까. 격렬한 알람과 마주하게 됐다. 객실을 청소해주시는 아주머니께서 문을 주먹으로 쾅쾅 두들기시길래 무슨일인가 싶어 나가보았더니, 테러리즘이라고 외치시며 빨리 나가라는 손짓을 하셨다. 자고 있는 동생을 깨워 휴대폰만 들고 허겁지겁 밖으로 나갔다.

로비로 나가보니 훈련 상황이 아닌듯 심각한 표정의 호텔 직원들이 비가 들이치고 있는 호텔 현관으로 안내해줬다.

이미 경찰차와 소방차가 한 대씩 호텔 앞에 서 있었다.

경찰관들 표정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는데, 훈련이라고 보고 넘기기에는 옆에서 여러가지 장비를 주섬주섬 챙기고 있는 소방관들이 이상해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호텔 현관에 서서 상황을 파악하려고 하고 있었지만, 언어의 장벽은 너무나 높고 견고했다. 심지어 묵었던 호텔에는 한국에서 온 패키지 여행객들도 많은 모양이었다.

상황이 잘 진행되지 않아 긴장이 풀리려는 순간, 소방차와 경찰차가 한 대씩 증원되었다. 다시 분위기는 심각해졌다. 아침 8시 15분쯤 나와서 40분쯤 서 있었을까. 다시 경찰차 두 대가 도착했다. 일반적인 순찰차와는 다른 차량들이었다. 지프에서는 견장에 별을 달고 리볼버를 허리춤에 찬 경관 둘이 내렸고, 조그만 냉장차 같은 데서는 경찰견 두 마리가 내렸다. 셰퍼드가 아니라 온몸이 새까만 털로 뒤덮인, 곰을 조금 닮은 녀석들이었다. 분위기는 더욱 심각해졌다. 이제 훈련이 아니라는 게 너무나 분명해졌다. 대충 계산하기에 120개가 조금 넘는 객실을 뒤져야 할 것 같았는데, 조금씩 초조해졌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허위 신고인지, 의심스러운 무언가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러시아 경찰들은 일요일 아침에 출동을 하고도 밝은 표정으로 철수했다. 경찰견 한 마리가 철수하면서 내 발을 밟고 지나갔는데, 발바닥이 묘하게 따뜻했다. 히히. 어쨋든 오전 9시 반 무렵에 우리는 객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여행지를 고르면서 치안을 항상 신경쓰는 편인데, 강도도 아니고 테러리즘이라는 단어를 듣고 대피하게 되다니. 연해주는 그야말로 여러가지 강렬한 기억을 안겨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체크아웃을 끝내고 블라디보스톡 역으로 향했다. 캐리어를 두 개나 들고 미리 찾아둔 역사 내의 물품 보관소에 맡기려는 생각이었는데, 꽉 찼다. 꽉 찬 걸로도 모자라서 열댓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가급적이면 유료서비스더라도 호텔에 짐을 맡기는 편이 좋다. 캐리어를 들고 에스컬레이터도 없는 역사 안을 오르내리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실망감을 안고 커피나 한 잔 하면서 시간을 보낼 겸 파이 패밀리로 향했다.

 

구글 스트리트뷰에서 보이는 파이 패밀리 건물. 셔터가 닫힌 자리에서 영업중이다.

파이 패밀리라는 이름을 보고 찾아갔지만, 사실 파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관심은 커피. 시원한 아메리카노라도 한 잔 하면서 기차를 타기 전까지 시간을 보낼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점심으로 먹기에도 애매한 것 같았고.

일단 가게 안은 상당히 좁다. 테이블 4개 정도가 간신히 들어가는 좁은 홀이었는데, 캐리어를 두 개나 놓고 음료를 마시기에는 좀 미안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큰 메뉴판에는 알파벳이 아닌 아즈부카 뿐이었지만, 미리 공부해 둔 게 도움이 됐다. 핫 초콜릿 한 잔과 따뜻한 아메리카노 세잔을 주문했다. 7월 말에도 얼음이 없다고 했다. 비록 시원한 음료는 없었지만, 커피 자체는 괜찮은 편이었는데, 한국에서 흔히 쓰는 원두가 아니었는지 조금 시큼한 끝맛이 났다.

종업원들이 영어를 어색함 없이 구사했고, 매우 친절했으며, 텐션이 높은 편이라 앉아있는 사람도 매우 편안하게 해주는 곳이었다. 혹시라도 다음에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타이밍을 잘 맞춰 반드시 파이를 맛보리라.

 

사치비에 다시 들러 거한 점심식사를 하고 약속의 16시 공항철도를 타러 갔다. 블라디보스톡 역 앞의 횡단보도를 건너면 왼편에 보이는 회색의 네모네모한 건물로 들어간다. 공항철도 역이다. 사전에 구입해둔 티켓을 들고 왼편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 대학 도서관 출입구에서나 보이는 모양의 개찰구를 만났다. 눈치를 잘 살피며 기차표 아래쪽에 있는 바코드를 붉은 불빛에 잘 갖다대고 플랫폼으로 나갔다.

15시 30분에 플랫폼에 도착했는데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15분 정도 후에 열차에 올라 15분을 더 기다려 공항으로 향했다. 약 한 시간을 달리며 왼편에 보이는 우중충한 바다를 감상하다보면 그럴듯한 플랫폼에 도착하게 된다.

 

공항철도의 오른편으로 보이는 크녜비치 국제공항의 모습.

공항철도의 종착역이 ㄱ자 모양으로 공항 건물과 붙어있다. 마찬가지로 공항에 들어갈 때 기차표를 태그하고 들어가야 하니 표를 버리지 않는 편이 좋다.